학창 시절 자주 들여다보았던,
김수영 시인의 시를 모아봤어요!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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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풀은 계속해서 눕고 쓰러지는데요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요
빨리 눕고 빨리 울고 빨리 일어나고 빨리 웃고
그게 삶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삶을 긍정하는 태도처럼 느껴지더라구요
매번 우두커니 서있을 수 없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그거면 충분한 것 같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에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들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군들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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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갈 수록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게 되는데요
저는 어른이라는 존재들은
많은 것을 아는 만큼 많이 부끄러워지는 사람들 같다고 느꼈어요
스스로가 옹졸해지는 순간을 마주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날이 많아지는 것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요
이 시를 읽고나니 그런 저의 옹졸함에 또 부끄러워지더라구요
어중간하게 발을 걸치고 서서
이만하면 됐다고, 합리화와 부채감을 덜 정도로만
목소리를 내고 눈을 맞추는 모습들이 떠올라
생각이 많아지는 시였어요. . .
저는 얼마나 작은 사람일까요?
폭포 -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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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등학생 때 정말 열심히
심상을 분석했던 시이기도 하네요 ㅋㅋㅋ
지금 다시 읽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하는데요
곧은 소리, 라는 표현을 중얼거리면
괜히 제 마음까지도 함께 단단해지는 것만 같아요
그저 떨어지는 것 부서질 것을 알고도
그것이 맞기 때문에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행위
그 소리는 또 다른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구절을 읽으며
폭포의 행위가 그저 그 자체로 당위성을 띄게 느껴지는 듯 했어요
바로 위에 올린 두번째 시와 연결해서 읽으면
더 울림이 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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