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회사에는 종이 서류들을 지하 창고로 이관해서 보관합니다.
몇 년 전부터 이 업무를 제가 맡아서 하고 있는데,
날짜나 요일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하면 되는 일이예요.
창고에는 직원분들이 계시는데 제가 서류를 가져가면 직원분들이 정리해서 넣어주세요.
처음 이 업무가 생겼을 때,
금요일에 가져가면 퇴근을 앞 둔 즐거운 금요일에 직원분들이 할 일이 생기니까
목요일 오후에 가져가기 시작했어요.
시간은 제 업무가 대충 정리되는 시간에 가져가구요.
작년에 한번 업무가 많이 밀려서 평소에 가는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창고에 갔는데
직원분이 웃으면서 "ㅇㅇ님, 좋은데 놀러가신 줄 알았어요. "하시더라구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냐고 여쭤보니
이 업무를 제가 맡아서 하기 시작했던 이후로 제가 늘 똑같은 시간에 왔었다고 하더라구요.
좋은 일이죠.
이 일은 단순히 서류를 창고에 쌓아두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원분들이 서류를 분류하고 라벨링하여 정리까지 하셔야 하는데
제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드리니,
직원분들은 그 스케줄에 맞춰서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저는 목요일 창고 내려가는 시간이 다가오면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가끔 업무가 밀릴 때도 있고 제가 처리해야 할 전화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는데
그 시간에 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요.
오늘도 받아야 할 전화를 기다리며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부리나케 뛰어갔다 왔네요.
사실 전혀 뛸 이유도, 마음이 조급해질 이유도 없는 일인데 말이죠.
*
강박증은 불안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강박장애는 불안장애의 일종으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특정한 사고나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해요.
강박장애는 강박적 사고와 강박적 행동으로 구분되는데
강박적 사고가 불안이나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라면
강박적 행동은 그것을 해소하는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당장 손을 씻지 않으면 병에 걸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강박적 사고를 일으키고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씩 손을 씻는 강박적 행동을 통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강박적 행동은 일시적인 안정감을 줄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불안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해요.
*
저희 할머니는 완벽주의 성향에 통제 욕구가 강하고 불안 수준이 높은 분이셨어요.
90이 넘은 나이에도 지하철이 도착하는 시간을 전부 외우고 계셨죠.
그걸 외우고 계셨던 이유는
가족들이 회사나 학교에서 출발하면 몇 분에 지하철을 타고
집 앞 지하철역에 몇 분에 도착하는지를 아셔야만 직성이 풀리셨기 때문이예요.
만약 본인이 예측한 시간에 가족들이 집에 오지 않으면 굉장히 불안해하셨고
90이 넘으신 나이에 집 밖으로 나가서 서성이기까지 하셨어요.
가족들은 혹시나 할머니가 혼자 나가셨다가 넘어지기라도 하실까봐 전전긍긍했지요.
저희 할머니는 저를 정말 많이 예뻐하셨는데
그 이유가 저는 본인의 예측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본인과 가장 많이 닮은 손녀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예요.
할머니의 이런 행동을 견디지 못한 다른 가족들은
본인 나름대로 반항을 하거나 독립을 하거나
할머니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수시로 연락을 드리는 각자의 방법을 선택했는데
나이가 많이 드시면서는 할머니의 고집을 아무도 꺾지 못했어요.
어릴 때는 할머니가 참 깔끔하고 완벽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할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참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할머니의 성향을 가장 많이 닮은 제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할지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했지요.
*
내려놓아도 괜찮다, 실수해도 괜찮다, 놓쳐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독이지만
사실 아직도 저는 생활 전반에 걸쳐서
저도 모르게 정해놓은 저만의 루틴을 깨지 않으려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쓰고 있어요.
실수로 화장실 불을 켜놓고 집을 비운 경험을 한 뒤로는
집을 나서기 전에 세 번씩 들어와서 확인을 합니다.
콘센트는 잘 뽑혔는지, 냉장고 문은 잘 닫혔는지, 현관문은 잘 닫혔는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까지 계속 확인을 합니다.
제 핸드폰 메모장은 아주 사소한 일정까지 다 적혀있어서 터질 것 같아요.
마트는 아무 때나 가도 되는건데 마트 가는 날까지 정해놓고
갑자기 다른 일정이 생겨서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져요.
*
찾아보니 미국국립보건원에서 만든
강박증을 진단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가 있더라구요.
여러 분도 한번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Part A에서 해당되는 증상에 모두 체크한 뒤
Part A에서 두 가지 이상의 항목에 해당된다면,
Part B로 넘어가 강박 정도를 확인해보세요.
Part B에서는 최근 30일간 느꼈던 증상을 바탕으로 강박 정도를 체크하면 되는데
Part A에 나열된 증상 중 두 가지 이상이 포함되고, Part B의 총점이 5점 이상이라면
강박증일 확률이 높으므로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길 권장한다고 합니다.
Part A
1. 더러운 것, 병균, 화학물질 등에 감염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괴롭다.
2. 물건을 정렬하거나 정확한 순서대로 나열하는데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
3. 죽음이나 무서운 사건이 일어날 것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롭다.
4.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든 종교적이거나 성적인 생각으로 괴롭다.
5. 집에 화재나 수해가 나거나 도둑이 들 것 같은 생각으로 괴롭다.
6. 차를 운전하다가 우연히 교통사고를 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7. 나로 인해 어떤 질병이 전염되어 퍼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8. 소중한 어떤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괴롭다.
9. 본인의 부주의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든다.
10. 사랑하는 사람을 해칠 것 같은 충동이 든다.
11. 다른 사람을 자동차로 칠 것 같은 충동이 든다.
12.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질 것 같은 욕망이 들어서 힘들다.
13. 다른 사람의 음식에 독을 탈 것 같은 충동이 들어서 힘들다.
14. 지나치게 자주 씻거나 치우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한다.
15. 전기제품, 수돗물이나 난로 등의 상태를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16. 지나치게 여러 번 계산하거나 정리하는 행동을 반복한다.
17. 꼭 필요치 않은 물건을 모으거나 불필요한 것을 모아두는 행동을 반복한다.
18. 한 가지 행동을 자신이 만족하는 횟수가 될 때까지 반복한다.
19.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20. 반복적으로 어떤 내용을 읽거나 쓰는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21. 어떤 병에 걸리진 않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자신의 신체를 반복적으로 살핀다.
22. 불길한 사건과 관련된 상징적인 숫자나 색깔, 이름 등을 피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23. 죄책감이나 자신의 언행에 대한 위안을 받기 위해 어떤 사실을 반복적으로 질문한다.
Part B
체크해보니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제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할 일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하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고 피곤해요.
이런 강박에서 제가 벗어날 수 있을까요?
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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