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본적으로 우울함을 타고 난 아이었다.
시작은 기억나지 않으나 나는 타고나길 그릇이 작은 아이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아이였고 그래서 쉽게 지쳤다.
세상에 모든 것은 나에게는 스트레스였고
그래서 나는 늘 지쳐있었다.
태어나긴 태어났는데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죽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10살도 되지 않았을 나이에 나는 엄마에게
-원래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엄마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고 황당한 말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말을 했던 때의 마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슬픈 것도 아니었고, 분노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아주 담담하게, 하지만 아주 무기력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내가 금방 죽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꼬마는 상상도 하지 못한 나이를 살아내고 있다.
여전히 무기력하게.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예쁘지 않아서.
인기가 없어서.
날씨가 너무 흐리거나 혹은 너무 맑아서.
온갖 이유로 나의 우울함을 표출하였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나는 나의 우울함을 숨길 줄 알게 되었다.
내가 우울함을 표현하면 사람들이 불편해하거나
혹은 나를 우울함의 늪에서 끄집어내주고 싶어한다.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취하면 나는 그것이 불편했다.
그래서 적당히 우울함을 숨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힘들면 웃는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 웃고 있다.
감정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졌고 내가 우울한 것에 무감각해졌다.
우울에 굳은살이 박히고나면 그렇게 또 하루를 버틸 수 있다.
예전에 회사 동료의 지인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평소에도 새털같이 가벼운 그는
자신의 지인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집에서 밥먹고 설거지까지 다 해놓고 그랬대.
우.울.증.이.라.던.데. 무.슨. 밥.을.먹.고.죽.냐?"
잘 모르겠다.
수없이 상상해 본 상황이라 그럴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것도 같은데
밥먹고 죽는건 이상한건가.
잘 모르겠다.
새털같이 가벼운 그의 말에
즉각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만큼
나는 철저하게 지쳐있었다.
직장에서 우울증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30여가지 항목에 대해 나의 마음 상태를 체크를 하는 검사였는데
한 개의 항목조차 쉽게 넘기기가 어려웠다.
[나는 슬픔을 느꼈다]라는 질문에 한참동안 머물렀다.
슬픔이라는 것은 원통함, 비통함, 서러움 같은 감정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나는 슬프지 않다.
아주 오랜 기간 그저 철저하게 무감각하고 무기력할 뿐.
산에 바위를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오늘도 숙제처럼 하루를 살아낼 뿐.
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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