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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날이였다.
과제를 하려고 노트북을 켰다. 그 날은 할 일이 정말로 많았다.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려도 겨우 목표치를 맞출 수 있을까 말까였다.
부팅이 되는 동안 음료수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갑자기 심장이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섰을 때나
전력 질주를 하고 난 뒤 숨이 턱 끝까지 차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였다.
심장은 요동을 치는데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아득해지고 숨이 막히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였다.
몇 분이나 지속되는 숨막히는 기분에 나의 손과 발, 머리카락은 식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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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집안 사정이 크게 흔들리면서 어떻게든 빠르게 취업을 해야 했으며
덕분에 졸업 준비, 취업 준비와 함께 아르바이트도 여러 개 병행하고 있었고
가끔 엄마는 울면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때는 정말 내 몸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금방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흘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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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예상보다 증상은 자주 찾아왔다.
가볍게 끝나는 날도 있었지만 30분 정도 증상이 지속되는 날도 있었다.
전신 근육이 긴장되니까 증상이 사라지더라도 온 몸이 아팠고 매일 두통약도 달고 살았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고 항상 불안했다.
'다 해야 하는데... 다 해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아.. 못하면 어떡하지..'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무슨 과를 가야 하는건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무작정 학교 정문 앞에 있는 가정의학과를 찾아갔다.
가정의학과 선생님은 내 증상을 가만히 듣고는 물으셨다.
"스트레스가 많아요?"
"아무래도 졸업학기니까요...." 나는 대답했다.
선생님은 정신과에 가보는게 좋다고 하셨다.
지금이야 유명인들의 공황장애, 우울증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오면서
정신과를 가는 것이 큰 일이 아닌게 되었지만
그 시절만 해도 정신과를 간다는 것은 상당한 결심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였다.
남들도 다 겪는 일인데 나만 예민을 떨며 유난스럽게 구는 것 같아서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병원에 가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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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병원에 찾아가게 된 것은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기 시작하면서였다.
나는 해야 할 공부량이나 과제량이 너무 많았다. 취업 준비도 해야 하는데 엄마의 하소연도 들어줘야 했다.
모든 짐이 너무 무겁고 버겁게 느껴졌다.
어느 날 부터는 과제를 하려고 하면 손 발에 땀이 줄줄 났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날도 있었다.
또 어느 날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가라 앉는 날도 있었고
이유없이 눈물만 펑펑 나는 날도 있었다.
특별히 몸 어디가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시커먼 먹구름이 나를 삼켜버린 기분이였다.
그렇게 병원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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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를 보기 전에 긴 설문지 문항을 작성하고 선생님과 면담을 나누었다.
나의 증상을 바쁘게 적어 내려가던 선생님이 딸깍, 하고 볼펜 소리를 내며 말했다.
"불안장애 같네요. 우울증도 있는 것 같구요."
그리고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나에게 너무 버거운데 버겁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완벽하게 해내려는 나의 강박적인 욕구가 나를 짓누르고 있고
일이 나의 욕심대로 풀리지 않으니 내 자신의 모자람을 탓하는 악순환이
결국 불안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내 키보다 깊은 강을 건너야 할 때는
가끔은 불필요한 짐을 버리고 갈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하셨다.
모든 것을 다 끌어안고 가다가는 결국 내 자신이 물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밖에 없다면서.
상담을 마치고 약을 처방 받았다.
정신과약 먹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증상이 나아지면 언제든 끊을 수 있다는 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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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내가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생각보다 빠르게 익숙해졌다.
무엇이든 잘 해야 한다는 강박,
그러면서도 한 없이 회피하고 싶은 무기력함에서 나를 끄집어 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약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결국 마음을 고쳐먹어야 하는 것은 내 자신이였다.
나는 당장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 했다.
휴식을 할 여유따위는 없었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였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내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과제를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아주 작은 목표치부터, 5분, 10분 단위로 쪼개서 생각하기로 했다.
태산 같았던 나의 불안을 아주 작은 덩어리로 떼어내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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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약을 먹지 않고도 잘 지낸다.
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불안은 언제든 나를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해서 그런 날이 오더라도 내 스스로 나를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불안을 키우는 것은 결국 나의 상상력이더라.
현실에 발을 제대로 딛고서서 나를 제대로 직면하는 사람이 되기를.
매일 조금씩 단단한 사람이 되어 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