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의 일이였다.
우리 부서에서 사용 중인 프로그램은
원 저작권사가 해외 업체이고 국내 업체에서 한국에서의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데
우리 회사는 연간 사용료를 국내 업체에 지불하고 프로그램을 사용 중이다.
그 일이 벌어진 시기는 프로젝트 막바지 기간이라
연일 계속되는 회의와 야근으로
굉장히 예민하고 피곤하던 시기였다.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사용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유통 업체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프로그램 저작권 관련 사용 방법이 변경된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회사에서 우리 측에도 공지를 줄텐데
아무런 공지도 받지 못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일은 아니지만
어쨋든 우리 부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툴이라
관련 부서에 전화를 걸어서 전후 상황을 설명하고 확인 부탁드린다는 말을 했다.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상대방이
"네, 알겠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상황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들린 상대방의 대답이 너무나 뜻밖이였다.
"그걸 왜 OO님이 알고 계시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침착하게 처음부터 다시 상황 설명을 했다.
"제가 매뉴얼을 보려고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입니다.
업체에 확인 한번 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프로그램은 OO 부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서 자기는 그 프로그램 관련 사항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니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내가 업체와 말이 가장 잘 통할 것이다.
그러니 업체와 내가 직접 연락하는 것이 맞다.
상황이 정리해서 사내업무협조문을 보내면
부서내에서 검토해보겠다는 것이 담당자의 입장이였다.
"사용료를 지불하는건 우리 부서 일이 아닌데요?"
"해당 업체의 공지가 OO님에게 갔으니까요."
"저에게 공지가 온게 아니라 해당 업체 홈페이지에 있는 게시글을 본거라니까요?"
"프로그램에 대해서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접촉하시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시스템 문제가 아니라 이건 비용 관련 내용인데요?"
"어쨋든 프로그램에 관련된 내용이므로 업무협조문 보내주세요."
나는 아직도 그 때 느꼈던
전신의 피가 거꾸로 도는 듯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은 아몰랑만 시전하며 버티기를 하고 있었다.
왜.... 왜...너는 나와 기싸움을 하려는거지?
이게 기싸움 할 일인가? 누가 봐도 너의 업무잖아.
그렇지 않아도 한껏 예민하던 시기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말 그대로 책상을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상대방을 어떻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였다.
나중에 옆에 있던 동료가 말하기를
내 언성이 점점 더 높아지자 통화 중인 나를 슥 보았는데
얼굴이 새하얗게 되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단다.
(나중에 알고보니 업체에서 공문이 내려왔는데, 그 팀의 누군가가 빠뜨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일 이후로 나는 발작버튼이 생성되었다.
사실 내가 그 때 공지를 보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 담당자는 꽤 골치 아픈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담당자가 곤란한 상황이 될까봐, 혹은 회사가 손해를 입을까봐
선의로 했던 행동인데, 나를 탓하며 모르쇠를 시전하고 업무를 떠맡기던 태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나는 이후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경계 태세를 취하게 된다.
예전에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가능한 돕는 편이였지만
이제는 업무분장에 미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업무를 넘기려는 낌새가 보이면 감정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져서
뭐든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그나마도 아직까지 내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속이 시원해지는건 한순간이고, 더 큰 후회가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
실낱같은 이성의 끈을 붙들고 겨우겨우 참고 있다.
이 이성의 끈이 언제 끊어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