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이 맘때쯤이면 생각나는 사람

"나 조울증 약을 먹고 있어"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셔틀버스에서 만난 선배가 나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선배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항상 웃고 있는 얼굴이였다. 우리가 친해지게 된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동기들과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우리 무리와 빠르게 친해졌던 것 같다. 선배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항상 유쾌했다.

 

선배는 자기 동기들보다도 두 살이 많았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것 외에도 휴학을 했었는지, 선배의 동기들은 대부분 졸업을 했거나 졸업반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사 경고로 몇 학기를 더 다니는거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은데 나는 학사 경고가 뭔지도 잘 모르는 신입생이라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선배에게 이상한 점이 딱 한가지 있었다. 가끔 1주일이나 2주일 정도 전혀 연락이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모든 수업을 같이 듣는다거나 항상 밥을 같이 먹는 사이가 아니였기 때문에 매번 선배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아니였다. 가끔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전화를 해보기는 했었던 것 같다. 그때마다 선배는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

그 날은 팀플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던 날이였다. 지하철역으로 가려고 셔틀 버스를 탔는데 선배를 만났다. 반가워서 냉큼 이름을 불렀다.

 

"요즘 왜 이렇게 안보였어요! 

되게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아요!"

"응, 몸이 안좋아서 좀 쉬었어"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였다.

 

셔틀을 타고 지하철역까지는 10분 남짓의 거리였다.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선배가 운을 떼었다.

 

"나 조울증 약을 먹고 있어"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 시절의 나는 조울증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 가끔 우울증 환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조울증 환자를 만난건 난생 처음이였다. 조증인 시기에는 엄청나게 하이(high)해진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때 했던 생각을 그대로 텍스트로 옮기자면) 선배는 전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

선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땅으로 꺼질 것 같은 우울한 기분으로 질환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증상이 사라졌지만 가끔 환청이 들리는 날도 있었다고 한다. 처음엔 우울증, 그 다음엔 정신분열증, 몇 번의 새로운 진단이 내려지고 최종적으로 '조울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고 한다. 

발병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학업 스트레스가 원인이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였다. 출석일수가 모자라서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했다고 했다. 졸업 후 2년 뒤에 진학을 하기는 했는데 휴학도 여러 번 했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약물 치료와 심리치료를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발병했을 때와 비교하면 증상은 크게 호전되었지만 가끔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격해지는 날에는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정신 질환이라는게 내 마음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게 당연한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는 정말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들고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초인적인 힘으로 버텨내고 있었던 것이다. 땅으로 꺼지거나 미친 듯이 하늘로 올라가는 자신을 이성적으로 통제하며 '너는 지금 아파서 그래, 오늘은 집에 가만히 있는게 좋겠어'라고 생각하며 며칠을 자신을 가둬둘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

나중에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 선배가 나에게 -그땐 미안했어-라는 말을 했다. 자신이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 날은 누군가에게 꼭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상대방은 많이 당황하고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어쨋든 털어놓고 나니까 조금은 후련해졌다고 한다.

 

이후로도 선배와 나는 잘 지냈다. 이후로 선배는 단 한번도 나에게 자신이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이란걸 말하지도, 티내지도 않았다. 항상 처음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 잘 웃고 장난도 잘 치는 사람이였다. 졸업 후에는 각자의 영역이 달라서 자주 연락하지는 못했지만 내 생일이나 신년이 되면 선배가 먼저 연락을 해주었던게 생각이 난다. 이상하게 내가 참 편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면서도 절대 어느 선 이상을 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부담을 느낄까봐 그랬겠지.

 

*

신년이 되니 그 선배가 생각이 난다. 몇 년째 매년 이맘때쯤 하는 생각이지만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가 먼저 연락해볼껄, 조금 더 챙겨줄걸. 하는 후회가 많이 든다. 선배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왔을 그때처럼.

지금은 더 이상 힘들지 않기를. 

선배, 정말로 고마웠어요. 

 

[조울증] 이 맘때쯤이면 생각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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